lacri [2] · MS 2002 (수정됨) · 쪽지

2017-10-12 12: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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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수의 기대값과 보상

게시글 주소: https://showmethescore.orbi.kr/00013479953

저는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또래 중에 스타크래프트를 한 게임도 안 해본 남자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저밖에 없을 정도죠. 요즘 인기있는 게임들도 대충 이름만 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와서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니 그냥 저는 실제 삶을 게임처럼 인식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쉽게 말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수능 점수가 게임 스코어였던 것이고, 합격한 대학이 게임의 보상이었던 것이고, 대학에 들어온 이후에는 총 자산이 게임 스코어로 바뀐 것 뿐이죠. 그 스코어를 늘리는 일 자체가 컴퓨터 게임보다 더 재미있었던 셈이죠. 이 글에서는 쉬운 이해를 위해 게임의 비유를 여기저기 차용해 보겠습니다. 제가 RPG는 정말 한 번도 안 해봐서 적절하지 않은 비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건 적당히 문맥으로 이해하고 양해해 주세요.



N수의 기대값과 보상


어제 "재수 및 N수는 굉장한 낭비" ( https://orbi.kr/00013469161 ) 라는 글에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고 이 글을 언급하는 수십 개의 글이 연이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이 들었습니다. (시간제약 상 원문의 본문만을 읽어보았고, 다른 댓글이나 글들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위 네임드 회원들도 여럿 등장하고, 저도 몇 개월만에 글을 쓰게 되었으니 그 이유만으로도 대단한 글입니다!) 제가 “N수로 대학을 갈아치워서 서울대에 간 케이스”였고 그 글의 취지가 그럴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표하는 글이었어서요. N수의 가치에 대해 N수생 본인이나 대학생 또래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대해서는 어제 올라온 많은 글들이 대변해준 것 같고, 저는 여러분과는 또 다른 세대의 입장과 관점에서 보이는 바를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원글이 N수의 기회비용을 1년 당 1억 5천만원으로 책정을 하였는데 합리적인 면이 있는 계산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N수에 성공한 입장에서 “N수의 기대값” 내지는 “(성공한)N수의 보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게요. 기회비용을 통화(currency)로 표시하였으니 저도 같은 기준을 사용하겠습니다.


일반적인 자산(대략 백만불 = 십억원 이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계열(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산의 증감을 계산하거나 예상할 때 보통 (+) (-) 연산을 떠올립니다. 1년에 버는 돈이 1억 5천만원이고, 쓰는 돈은 1억원이니까 5천만원을 저축하게 되고, 그렇게 10년이면 5억원이다, 뭐 그런 식으로요. 반면 자산이 백만불 정도의 경계선을 넘어가면 주된 연산이 (x)로 바뀝니다. 작년에는 자산이 100억원이었는데, 올해는 20%가 늘어서 120억원이네, 뭐 그렇게요. 저처럼 밑이 10인 상용로그를 일상에서 사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100억원에 로그를 붙이면 10이죠. (달러로 표시할 거면 3을 빼면 됩니다) 그러면 작년에는 자산이 10.00 이었는데 올해는 0.08= log (1+20%) 가 늘어나서 10.08 이네, 이 속도로 11(= 1000억원) 에 가려면 12년 6개월 정도가 걸리겠구나.


10” 정도의 로그 스케일을 지나게 되면 그 무렵부터는 총 자산이 실생활을 더 풍족하게 해주는 수단이나 매개체가 되기보다는 일종의 게임 스코어의 의미가 더 커지게 됩니다. 돈이 더 필요해서 번다기 보다는 레벨 “10”에서 레벨 “11”로 가보거나, 나보다 0.5 높은 다른 플레이어를 따라잡고, 이기거나, 레벨 “12”, 레벨 “13”에 있는 끝판왕을 찾아가서, 끝판을 깨는데 도전해 보거나. 그리고 그 과정이 정말 게임만큼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마치 게임중독자가 된 어린이처럼 일중독이 되는 어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게임은 하루에 14시간, 16시간을 해도 지치지 않잖아요, 일이 게임이 되면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인생의 게임”에서 “서울대” 혹은 그에 상응하는 좋은 학벌이란, 게임을 하는데 사용하는 “무기”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 무기는 굳이 하나의 숫자를 꼽자면, 여러분의 자산 스탯을 “+0.5” 정도 늘려줄 수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여러분이 그 무기를 잘 강화하는데 성공해서 +0.5 이상의 더 좋은 무기로 바꿀 수도 있을 거고, 서울대에서도 허송세월을 해서 무기를 녹슬게 할 수도 있겠지만요, 그냥 평균적으로는. “서울대” 검이 +0.5 라면, “연세대”와 “고려대” 검은 어느 정도 되는 무기냐? 라고 묻는다면, (더 자신이 없긴 하지만) 아마 +0.25 정도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10의 0.5승은 3이니까, 여러분의 기대 자산을 (학벌이 없는 것 대비) 3배 정도 더 강화시켜주는 도구가 될 것이고, 연고대 대비로는 서울대가 +0.25만큼 또 차이가 나니까 10의 0.25승, 대략 80% 정도 자산을 더 늘려주는 도구가 될 것이라 추측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기는 여러분이 처한 위치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그에 따라 기회비용을 상쇄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고, 시간낭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자산이 없더라도 인생 전반을 통틀어 큰 그림을 그리고 있거나, 아니면 애초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이미 자산이 많다면 로그 +0.5 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11.0(1천억원)0.5를 더하면 2천억원이 더 늘어나서 3천억원(11.5)이 되는 것이지만, 6.0(100만원)0.5를 더해봐야 300만원(6.5)이 될뿐인 것이죠.


아무튼 이 log +0.5 연산을 통해 늘어나게 될 값에 여러분이 N수의 결과 서울대에 합격할 가능성을 곱하면 그것이 N수의 기대값이 될 것입니다. (서울대가 아니라 다른 학교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log +0.5 값을 적절하게 보정을 해야겠네요. 대신 합격할 가능성이 좀 늘어나겠죠?) 이 값이 N수의 기회비용보다 크다면 N수를 감행하는 것이 합리적인 결정이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일종의 "계산된 리스크"이고 계산된 리스크를 꾸준히 잘 쌓는 것이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더 높은 레벨에 도달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출신학교라는 무기는 평생을 따라다니고 일정 시점 이후부터는 바꾸기 힘들기 때문에 중요한 무기 중의 하나이긴 합니다. 자산을 강화하는 무기는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N수를 하는 대신 그런 무기를 갖출 수도 있지요. 다만 그런 무기들이 19살, 20살 무렵에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기에 지근거리에 있는 N수를 택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걸 두고 몇 살 선배들이나 어른들이 왜 학벌에 목을 매고 시간 낭비하냐는 식으로 비아냥댄다면 그건 너무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 잊어버린 말이라 생각합니다. 






N수 적합성


저는 좋게 말하면 배포가 두둑해서, 나쁘게 말하면 과대망상이 심해서, 위기나 실패에 봉착했을 때 한 번도 “이제는 포기해야겠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이게 돼야 맞는데 왜 안 되지… 좀 더 배우고 와서 다시 해봐야겠다”의 연속이었고, 결국 지금까지는 매번 되기는 했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N수를 “되어야 할 것이 되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꾸준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노력한 과정” 정도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제와서 이야기고 그 과정 중에는 아주 힘들었었죠.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어서 한 번도 희망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N수 결정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바를 함축한 말인 것 같아요. N수를 하는 건 아주 커다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여러분이 더 체계적으로 갈고 닦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야지, N수가 명문대 합격증이라는 기분 좋은 뱃지를 받기 위해서 단순히 도박을 할 기회를 한 번 더 얻기 위한 도피가 된다면 N수는 여러분의 소중한 젊음과 기회비용만 날리는 늪이 됩니다. 게임을 할 때도 그렇잖아요, N수라는 게임에서는 말하자면 서울대가 끝판 왕인데, 이 보스 몹을 때려잡으려면 무기도 강화하고, 짜잘한 몹들도 계속 잡아서 경험치(모의고사 점수)도 늘리고 레벨(수능 등급)도 올리는 것이 맞죠. 그렇게 하는 과정이 수능 시험 공부인 것이고요.


여러분이 꾸준히 공부해서 시험 범위 내의 지식에 대해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이 알게 된다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을 뿐이지요. “큰 그림”, “배포” 그리고 그걸 실현가능하게 한 끊임없는 노력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짧게는 성공적인 N수, 길게는 성공적인 인생을 여러분들이 보상으로 받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1류 환경


“큰 물”에 들어가면 격차를 깨닫고 좌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 물은 내가 접수하겠다”는 배포로 하루하루 더 커다란 물고기가 되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대(혹은 그에 상응하는 1류의 환경)는 후자의 사람에게는 단순히 스탯을 +0.5 강화시켜주는 도구를 넘어서 인생을 바꿔주는 환경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장의 한계를 그가 속한 환경이 정의하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의 일종이었고요. “이 서버 1등이 누구냐? 내가 너를 이겨보겠다”라고 하면 더 큰 서버, 더 뛰어난 플레이어가 많은 서버에서 싸워나가는 과정중에 그 게이머도 더 많이 성장을 할 수 있겠죠.


시험의 여러 목적 중 하나는 응시자를 변별하는 것입니다. 시험이 변별에 실패할 때는 응시자가 만점을 받거나 0점을 받았을 때이죠. 응시자가 만점을 받았을 때에는 그 응시자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측정하는데 실패한 겁니다. 다시 말해 100점 만점 시험에서 100점을 받은 학생은 110점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 150점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0점을 받았을 때에는 그 응시자가 얼마나 아는 게 없었는지 측정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적어도 한 문제를 틀리거나 적어도 한 문제를 맞혔을 때에만 평가가 가능하죠. “1등”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언제든 “1등”의 한계는 측정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2등”의 한계는 1등과의 격차로 정의 및 평가할 수 있는 것이고요.


보통 대학의 커트라인을 이야기할 때 “380점 이상”과 같은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럼 이걸 거꾸로 뒤집어서 각각의 대학의 역커트라인, 다시 말해 위쪽 방향으로의 커트라인은 몇 점 이하일까요? 평범한 대학이 "300점 이하", 연고대가 “395점 이하”와 같은 식이라면 서울대는 “만점 이하”입니다. 서울대, 혹은 그에 상응하는 어떤 도메인에서의 “1등”이란 위쪽으로의 한계가 없습니다. 한계를 측정받지 못한 몹들이 우글거리고요. 여러분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한계가 없는 환경은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가장 큰 무기가 됩니다. 그 서버에 로그인한 시점이 좀 늦었다해도 별 지장 없습니다.



N수를 시작했을 때 어떤 목표로,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선택하셨나요? 여러분이 인생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목표를 이룰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그동안 꾸준히 시험 준비를 잘 해왔다면 여러분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기 때문에 동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깨 펴고 걸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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