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역교 민족역교 [871793] · MS 2019 · 쪽지

2020-10-25 21:5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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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사상) 순자 고난도,지엽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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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순자사상의 구성

 제 3항 예치주의


윤사하시는 분은 지하철 가실때 천천히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포인트:

 

순자라고 군주의 권세만을 강조하진 않았다. 

순자는 백성 사랑에 기반한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가장 중요시했다.

순자는 왕도정치가 최상이나 패도정치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맹자가 패도정치를 지극히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에 비해).

맹자: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의 길이다.” 아마 평가원이 좋아하는 순서 바꾸기로 선지 만들기 가능할듯.


아마 교과외) 순자의 예치(禮治) 사상은 바로 공자사상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킨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순자가 유교의 이단아로 공부되어지는 데 반면 사실 공학의 적통계승자이다. 적어도 이 글에서는 그렇게 평가하네요.


순자는 수급조절에 의해 재화의 부족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반해 법가는 인간의 이욕은 절제가 불가능하고 재화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욕과 재화간의 수급조절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순자에게 예는 분배기준이자 욕망의 제한 정도이다. 


그러나 순자는 법가와 달리 인간의 사려작용에 따른 악성의 ‘선화’를 확신했기 때문에 이욕을 충분히 절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순자는 법가와는 다르게 인간의 선해질 수 있음을 주장했다. 교화 가/불가로 선지 분리 가능. 교화라는 단어의 애매함은 차치합시다.


순자가 말한 ‘예’는 교정을 전제로 하는 법가의 법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자율적인 자기통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순자가 생각하는 ‘예’는 일방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통일된 조화 속에 평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순자는 공자가 덕치의 요체를 ‘인’으로 본데 반해 바로 ‘예’라고 본 셈이다. ‘예’에 의해 그 분수를 한정함으로써 개인 간은 물론 개인과 국가 간에도 상호간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 순자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순자가 ‘예치’를 주장한 것은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기 위한 것이지 욕망을 아예 없애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제욕(制欲)’이 목적이었지 ‘절욕(絶欲)’이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욕망의 제거 X! 윤사 내의 어떤 사상가도 모든 욕망 제거는 틀립니다. 상식적으로 밥도 못먹게는 못하잖아요.


그러나 순자는 법가와는 달리 ‘예’를 앞세우면서 ‘법’을 뒤로 미루는 이른바 ‘선례후법(先禮後法)’의 입장에 입각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이 바로 법치에 관한 순자와 법가의 기본관점이 극명하게 갈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선입견과는 다르게 순자도 예가 먼저입니다!



순자의 예치사상은 근원적으로 그의 존군(尊君)사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순자는 군주를 예치의 모범인 동시에 치란(治亂)의 관건으로 보았다. 그의 존군사상은 그의 예치사상과 마찬가지로 현실주의의 바탕 위에 입론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예를 제정하고 지켜나가야 할 군주가 모범을 보여야겠죠? 


그러나 순자의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군신 상하간의 절도를 감독하기 위해 군주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법가가 말하는 ‘귀군’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순자가 존군을 주장한 것은 군주에게 예치의 실현을 감독하고 관리해야 하는 중요한 직무가 부여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순자가 말하는 군주는 비록 지존의 자리에 있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예치의 실현을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 그 자신이 영토와 민중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예치 실현의 수범이 되어야 하는 군주는 일종의 신민의 공복일 따름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 순자라고 위민, 수기치인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가망론’가 ‘승계설’은 순자가 군신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존군사상을 고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존군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민(爲民)’에 두고 있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대략」편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하늘이 인민을 낳은 것은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늘이 군주를 세운 것은 인민을 위한 것이다.”
이는 통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위민’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순자가 언급한 ‘법치’와 ‘존군’은 어디까지나 ‘예치’와 ‘위민’의 보조 개념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순자와 법가의 주장이 극명하게 갈리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순자의 ‘위민’사상은 맹자의 ‘귀민’사상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맹자는 군주와 인민의 순위가 차별적으로 확정된 ‘귀민경군’사상을 주장한데 반해 순자는 군민 간에 우선순위를 배제한 일종의 ‘중민존군(重民尊君)’사상을 주장한 셈이다. 순자는 인민을 위한다고 해서 결코 군주를 가볍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왕제」편에 나오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다음은 제 3장 전문입니다. 정 심심하시면 읽으세요.


순자는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군거(群居)에 있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일한 사유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사고의 흐름을 그쳤으나 순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군거를 조화롭게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예(禮)이다. 「순자」에 나오는 ‘예’는 ‘예의(禮義)’ 내지 ‘예의(禮儀)’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순자는 「영욕」편에서 군거와 예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무릇 귀하기가 천자와 같고, 부유하기가 천하를 차지할 정도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인정(人情)이 똑같이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그 욕망을 좇자면 형세가 이를 받아들일 수 없고, 물건 또한 넉넉할 수 없다. 그래서 선왕은 생각한 끝에 이를 위해 예의(禮義)를 제정하여 분수를 정하고, 귀천에 등급을 두고, 장유(長幼)에 차등을 두고, 지우(知愚: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ㆍ능불능(能不能: 능력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구분을 두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맡을 때 그 합당한 일을 갖게 한 뒤 곡록(穀祿: 녹으로 받은 곡식)에 다소후박(多少厚薄)의 균형이 있게 했다. 이것이 곧 군거화일(群居和一)의 방도이다.”
여기의 ‘군거화일’은 「예기」「예운(禮運)」편에서 말하는 ‘대동(大同)’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순자는 여럿이 모여 살면서 하나로 조화된다는 뜻을 지닌 ‘군거화일’로 이상국가의 모습을 요약한 뒤 그 요체가 바로 예의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거화일’의 사상적 연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소위 예의염치(禮義廉恥)로 표현되는 관중의 4유(四維)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초 관중은 국가를 세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덕목으로 예의염치의 4가지 덕목을 제시한 바 있다. 그가 말한 4유는 곧 국가존립 및 국권확립의 근간이 되는 덕목이다. 관중이 4유의 덕성을 국가존립 및 국권확립의 기본전제로 내세운 것은 공자가 개인의 덕성훈련을 도덕국가 실현의 기본조건으로 내세운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관중이 내세운 4유는 개인적 덕목인 ‘염치’로 수렴할 수도 있다. 명말청초의 고염무(顧炎武)는 「일지록(日知錄)」에서 4유 중 유독 치(恥: 수치)를 강조한 바 있다. 이는 불렴(不廉)과 패례(悖禮), 범의(犯義) 모두 무치(無恥)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염무의 이런 입장은 수신문제를 개인차원에서 출발해 통치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킨데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예의염치에 입각한 정치를 소위 ‘군자정치(君子政治)’로 구체화했다. 공자가 14년간에 걸쳐 천하를 순회하며 역설한 것이 바로 ‘군자정치’였다. 그가 군자정치를 제안하고 나선 것은 바로 바람직한 정치는 제도 이전에 사람에 있다고 확신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예기」「중용」편에 나오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뒷받침한다.
“정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사람을 취하는 데는 몸으로 하고, 몸을 닦는 데는 도로써 한다. 도는 ‘인(仁)’으로 하는 것이니 ‘인’이란 곧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군자정치는 바로 ‘위정재인(爲政在人)’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위정재인’의 요체는 ‘인인(仁人)’에 의한 통치 즉 ‘인치(仁治)’에 있다는 게 공자의 기본 입장이었다. 공자의 이런 입장이 보다 구체화되어 표현된 것이 바로 「예기」「대학」편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사상이다. 여기의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다. 양자는 상호 내포(內包)와 외연(外延)이라는 밀접한 관계에서 출발하고 있다. 공자가 말한 군자정치는 수신제가를 이룬 군자가 치국평천하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을 강조하면서도 인의(仁義)에 입각한 통치를 강조한 맹자의 주장과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맹자는 비록 ‘인’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가 말한 ‘인의’는 ‘의(義)’에 무게를 둔 것이었다. 당초 맹자는 열국이 약육강식의 논리에 좇아 상쟁하고 있던 전국시대의 난맥상황 속에서 인의의 실현이라는 높은 이상을 내걸고 어지러운 세상을 수습하고자 했다. 인의에 입각한 정치를 펼치면 저절로 천하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어 드디어는 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이었다.
맹자의 이런 생각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성선설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공자를 사숙(私淑)하는 와중에 공학(孔學)의 적통을 자처하면서 공자가 말한 ‘인’의 실현만이 난세를 구할 유일한 방안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공학과 동떨어진 주장을 펼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그가 새로이 들고 나온 ‘인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초 공자는 모든 덕목을 ‘인’ 개념으로 집약시켰다. 공학에서 원래 ‘인’에 준하는 덕목으로 유일하게 거론된 것은 ‘예(禮)’밖에 없다. 이에 반해 ‘의(義)’는 「맹자」에 모두 1백여 회에 걸쳐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어」에는 겨우 24회에 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과 ‘의’가 같이 언급된 사례가 없다. 맹자는 ‘의’를 ‘인’과 병칭시킴으로써 공자사상에서 ‘인’을 실현하는 핵심 덕목인 ‘예’를 극히 소홀히 다룬 것은 물론 ‘인지예의’로 되어 있는 원래의 배열을 ‘인의예지’로 바꿔놓았다.
공학의 적통을 자처한 맹자가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전통을 무시하면서까지 ‘의’를 떼어내 ‘인’과 결합시킴으로써 ‘인의’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낸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그간 여러 해석이 제시되었다. 과거에는 대체로 공자의 ‘인’을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 양주와 묵자의 세력이 위세를 떨침에 따라 이들을 ‘불의’로 성토하기 위해 ‘의’를 특별히 내세웠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맹자가 활약하던 전국시대 중기에는 양주의 ‘위아(爲我)’사상과 묵자의 ‘겸애(兼愛)’사상이 크게 유행했다. 이는 유가의 ‘친친(親親)’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인륜을 중시한 맹자에게 이들의 주장이 유가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비춰졌을 가능성이 크다. ‘친친’사상은 부모에 대한 사랑과 이웃을 대하는 사랑에 차등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 까닭에 인간관계의 친소(親疏)를 그대로 인정한 가운데 ‘인’을 실현해야 한다는 취지에 입각해 있다. 맹자는 사실 양묵의 사상을 유가의 ‘친친’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금수지도(禽獸之道)’로 간주했다. 그는 「맹자」「등문공 하」편에서 양묵의 학설을 이같이 비판했다.
“양주의 주장은 자기 위주여서 군주를 부정하고 묵적의 학설은 겸애를 표방하면서 부모를 부정했다. 안중에 부모가 없고 군주가 없으면 이는 금수라 할 것이다.”
맹자는 양묵에 강력 대항하기 위해 특히 ‘의’라는 덕목을 따로 떼어내 ‘인의’라는 개념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맹자」 전편에 걸쳐 맹자가 ‘불인불의’한 군주를 질타하면서 양묵에 대해 가차 없는 공격을 펼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맹자가 ‘술이부작’의 전통을 깨고 인의개념을 새로이 제창한 배경을 단순히 양묵에 대한 방어 때문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다분히 평면적인 분석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창안한 인의개념을 그가 제창한 4단설과 관련지어 분석할 필요가 있다. 맹자의 인의 개념이 4단설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의예지의 4덕은 그의 성선설로 인해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의 경우 원래 인의예지뿐만 아니라 효제충신예(孝悌忠信藝) 등 다양한 덕목을 거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이들 덕목들을 모두 ‘인’이라는 개념 속에 용해시켜 버렸다.
그러나 맹자는 자신이 주창한 성선설을 토대로 인의예지라는 4개의 덕목만을 따로 뽑아내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이로써 공자가 말한 ‘인’ 개념은 극소로 축소되고 말았다. 원래 공자의 ‘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를 군주와 백성간의 관계로 한정시켰다. 맹자는 ‘인’에 이어 ‘예’ 개념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칼질을 했다. 그는 공자가 ‘예’를 국가질서 전반을 지배하는 문화적 상층구조로 해석한 것과 달리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예’를 통상적인 예절차원의 의미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그는 공자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인’과 ‘예’ 개념을 임의로 개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맹자는 자의적인 개조작업을 통해 ‘인’과 ‘예’를 새롭게 규정한 뒤 이를 토대로 인의예지 4덕만이 인성의 근본을 이루는 ‘불변의 선성(善性)’이라고 규정하고 나섰다. 순서를 따지면 맹자는 자신의 4단설을 합리화하기 위해 4덕에 대한 개조작업을 먼저 시작한 셈이다.
「맹자」「고자 상」편에는 맹자가 ‘인의’와 관련해 ‘의’가 왜 인성의 본원에 속하는지 여부를 놓고 고자(告子)와 심각한 논전이 전개한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고자는 ‘인’은 인성 안에 있는 것이나 ‘의’는 인성 밖에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맹자의 ‘의’ 개념을 ‘인’ 개념 아래로 격하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 맹자는 ‘의’는 ‘인’과 마찬가지로 인성의 본원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과 ‘의’를 동일한 수준에 놓으려는 의지를 감추지 않고 있다. 맹자사상에서 ‘인’과 ‘의’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고자 상」편에 나오는 맹자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의 길이다.”
이는 그가 「이루 상」편에서 ‘인은 사람이 머무는 안택(安宅)이고, 의는 사람이 걸어야 하는 정로(正路)이다’라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안택’과 ‘정로’는 분명 개념상 별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불가분의 관계로 해석한 것이다. 맹자는 이로(異路)를 통한 ‘안택’으로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이런 비유를 통해 확보한 것이다.
맹자의 주장에 따르면 ‘안택’으로의 접근은 오직 ‘정로’밖에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이를 맹자의 4단설로 해석하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현되었다 하더라도 ‘수오지심(羞惡之心)’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인의’로 평가받을 수 없게 된다. 공자의 기준에서는 얼마든지 ‘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 맹자의 기준에서는 ‘인의’가 아닌 것이 되는 셈이다.
원래 공자는 다양한 ‘이로(異路)’를 통한 ‘안택’으로의 접근을 허용했다. 이 점에서 공자와 맹자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관중을 평가할 때 ‘정로’에 해당하는 ‘수신의 인’을 이루지 못한 관중이 ‘대의’라는 ‘이로’를 통해 ‘인’이라는 ‘안택’에 도달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맹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로’를 걷지 않은 관중의 패업은 설령 ‘인’에 해당하는 공업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결코 인의로 평가받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맹자가 ‘이로’를 통한 ‘안택’으로의 접근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맹자가 관중은 물론 일체의 패업을 폄척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맹자에게 일체의 패도는 일종의 ‘이로’에 불과했던 것이다.
맹자가 제시한 높은 수준의 인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공자가 말한 ‘인’을 발현시킨 위에 다시 ‘의’의 기준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공자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관중의 패업이 맹자에게 일언지하에 폄하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관중은 공자로부터 비례 등을 이유로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패업에 의해 대의차원의 ‘인’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는 공자가 ‘인’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포괄적인 해석을 허용한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맹자는 관중이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동시에 발현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를 단호히 폄하했다. 물론 맹자는 표면상 관중이 무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인’을 가장하는 가증스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맹자가 왕도 실현의 구체적인 사례로 들고 있는 탕(湯)과 주무왕(周武王)의 경우도 사실 무력을 동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맹자가 관중의 패업을 폄척한 근본 이유는 관중이 무력을 동원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보다는 관중의 패업이 맹자가 제시한 인의의 기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맹자가 내세운 인의의 기준은 사실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것이었다. 설령 그 자신이 왕도의 실현을 확신했을지라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패도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적잖은 문제가 있다. 열국의 제후가 맹자의 주장을 전혀 채택하지 않은 사실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맹자는 공학의 적통을 자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사상을 자신의 성향에 맞게 멋대로 왜곡시켰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그가 만들어낸 ‘인의’개념은 공자의 ‘인’개념과 비교해 볼 때 분명히 협소한 것이었다. 공자의 ‘인’ 개념이 맹자의 ‘의’ 개념 속으로 함몰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맹자의 ‘인의’ 사상은 ‘인’과 ‘의’라는 두 개의 개념을 병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의’의 실현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맹자는 일종의 의치(義治)를 주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맹자의 ‘의’ 개념은 묵자가 말한 ‘의’ 개념과 내용상 거의 차이가 없다. 맹자사상이 묵가와 마찬가지로 교조적인 교설(敎說)의 성격을 강하게 띤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맹자가 묵가의 ‘의’ 개념을 차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인 ‘인의’ 사상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기존의 학설이 맹자의 ‘인의’사상에 따른 통치를 흔히 ‘인정(仁政)’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이는 ‘인의’를 표방한 맹자의 진의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결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맹자는 인의에 충실한 ‘의인(義人)’이 다스리는 정치 즉 ‘의치(義治)’를 가장 이상적인 통치로 상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내세운 왕도는 곧 ‘의인’이 다스리는 나라 즉 ‘의국(義國)’이었던 셈이다. 맹자가 공학체계에서 ‘의’를 따로 떼어내 ‘인의’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의치’의 실현에 그 기본취지가 있었다고 보아도 대과는 없다.
순자는 맹자의 ‘인의’ 개념 도입으로 그 기본취지가 크게 왜곡된 공학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그가 맹자에 의해 통상적인 예절 차원으로 격하된 예(禮)를 공자 당시와 마찬가지로 ‘인’을 실현하는 최고의 덕목으로 격상시킨데 따른 것이었다. 순자의 예치(禮治) 사상은 바로 공자사상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킨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원래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사적인 이욕 때문에 다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군거(群居)를 영위하는 한 혼란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 군거화일(群居和一)의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준과 원칙이 존재해야만 한다. 순자는 이를 ‘예’에서 찾은 것이다. 이는 「순자」「예론」편에 나오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욕망을 갖고 있다.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면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추구하는데 도량분계(度量分界: 일정한 기준과 한계)가 없으면 다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투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궁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도량분계’가 바로 순자가 말하는 ‘예’인 것이다. 순자는 일정한 기준과 한계가 없을 경우 필연적으로 군거를 영위하는 인간은 무한한 욕망으로 인해 반드시 다툴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의 이욕은 어쩔 수 없다고 보기는 했으나 재화의 공급이 충분히 뒷받침될 수 있기 때문에 ‘도량분계’만 정해주면 수급조절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점이 바로 순자와 법가가 갈리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순자와 법가가 갈리는 가장 큰 원인은 인간의 이욕과 재화와의 관계에 대한 시각차에 있다. 순자는 「부국」편에서 이같이 말했다.
“천지가 만물을 만들 때는 본래 여유가 있어 사람들을 먹이기에 충분했다. 마갈(麻葛: 삼과 칡)ㆍ견사(繭絲: 누에와 면사)ㆍ조수(鳥獸)의 우모치혁(羽毛齒革: 깃과 털, 이빨, 가죽) 등도 본래 여유가 있어 사람들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순자는 수급조절에 의해 재화의 부족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반해 법가는 인간의 이욕은 절제가 불가능하고 재화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욕과 재화간의 수급조절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법가가 인간의 제어할 수 없는 이욕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오직 엄한 형벌에 의한 법치밖에 없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순자는 법가와 달리 인간의 사려작용에 따른 악성의 ‘선화’를 확신했기 때문에 이욕을 충분히 절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순자가 ‘도량분계’만 정해주면 얼마든지 인간의 이욕을 절제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순자가 말한 ‘예’는 교정을 전제로 하는 법가의 법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자율적인 자기통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순자가 생각하는 ‘예’는 일방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통일된 조화 속에 평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순자는 공자가 덕치의 요체를 ‘인’으로 본데 반해 바로 ‘예’라고 본 셈이다. ‘예’에 의해 그 분수를 한정함으로써 개인 간은 물론 개인과 국가 간에도 상호간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 순자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순자가 예치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군신 상하 간에 원만한 질서와 절도가 자율적으로 이뤄지는 일종의 예치국가 즉 ‘예국(禮國)’이었다. 순자가 그린 ‘예국’은 공자가 그린 ‘인국(仁國)’과 비교할 때 ‘인’ 대신 ‘예’가 들어섰을 뿐 기본적인 맥락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인’과 ‘예’는 각각 104회와 74회에 달한다. ‘인’과 ‘예’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 등에 주목해 공자가 말하는 ‘인’은 전래의 ‘예’ 개념을 확대ㆍ발전시킨 것으로 본질적으로 ‘인’과 ‘예’는 동일한 개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사실 순자는 공자가 ‘예’를 ‘인’을 이루는 핵심적인 덕목으로 거론한 점에 비춰 공자를 조술(祖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학을 충실히 조술한 사람은 맹자가 아니라 바로 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예’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해 순자는 ‘예’는 오직 덕이 많고 모든 이치에 통달한 이상적인 인간인 성인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악」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의(禮義)와 법도(法度)라는 것은 성인의 위(僞)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성인이 인성을 교화하고 작위를 일으키어 예의를 만들어 낸 뒤 법도를 제정한 것이다.”
‘위’는 인성의 교화를 위해 사려에 따라 올바르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예’는 성인의 ‘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사람의 본성을 올바르게 이끌고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규범이 될 수 있다는 게 순자의 생각이다. 이를 통해 그가 말한 ‘예’는 공자가 언급한 ‘예’에 비해 훨씬 규율적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순자가 활약한 전국시대 말기의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는 이처럼 규율적인 ‘예’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극상이 만연했다. 이는 인성의 악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만들었다. 순자는 ‘예’만이 이러한 혼란상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성악」편에 나오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뒷받침한다.
“무딘 쇠는 반드시 숫돌에 간 뒤에야 날카로워 진다. 사람의 악성도 반드시 법의 가르침이 있은 뒤에야 올바로 되고 예의의 규제를 받은 뒤에야 다스려진다.”
순자는 여기서 ‘예’란 인성의 악성을 교화하기 위한 처방전인 동시에 다스림의 기본 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순자가 ‘예치’를 주장한 것은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기 위한 것이지 욕망을 아예 없애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제욕(制欲)’이 목적이었지 ‘절욕(絶欲)’이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순자가 의도한 ‘예’의 진정한 목적은 모든 인민의 물질생활을 최대한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의 욕망을 절제하는 수단을 빌리자는 데 있었다.
순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결코 악한 것은 아니나 일정한 한계가 주어지지 않을 경우 욕망 자체의 무절제로 인해 타인의 욕망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예’만이 인간의 욕망에 일정한 절제를 가하여 인격을 도야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공자는 ‘예’를 ‘인’을 이루기 위한 주요한 덕목으로 보았으나 순자처럼 물질을 재는 도구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순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공자가 말한 ‘예’를 물질에 대한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을 제어하는 개념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여기서 바로 순자의 예치사상이 형성된 것이다.
순자의 예치사상은 훗날 그가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관련해 적지 않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순자는 법가와는 달리 ‘예’를 앞세우면서 ‘법’을 뒤로 미루는 이른바 ‘선례후법(先禮後法)’의 입장에 입각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이 바로 법치에 관한 순자와 법가의 기본관점이 극명하게 갈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원래 ‘예’와 ‘법’ 사이의 간극은 매우 미세한 것이어서 확연히 구별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나라 때의 봉건사회에서는 관혼상제 등의 ‘예’가 그 자체로서 ‘법’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이후 종법사회가 무너지면서 다양한 법제가 ‘예’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규범이 급작스럽게 폐기되기는 어려웠던 까닭에 새로이 생긴 법제조차도 ‘예’로 불리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예’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확장되자 ‘예’와 ‘법’이 서로 혼동되는 일이 빚어졌다.
그러나 순자의 입장은 확연했다. 그는 ‘예’와 ‘법’의 상호관계에 대해 ‘법’은 어디까지나 ‘예’의 보완개념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정론」편에 나오는 그의 다음과 같이 언급이 뒷받침하고 있다.
“다스림이 예전에는 달랐다. 작위는 덕을 넘지 않았고 관직도 능력을 넘지 않았다. 상을 내리는 것은 공을 넘지 않았고 벌도 죄를 넘지는 않았다.”
순자는 여기서 ‘경상형벌(慶賞刑罰)’의 기틀이 무너지면서 통치 질서가 문란케 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통치에는 궁극적으로 ‘치법(治法)’보다 이를 운용하는 ‘치인(治人)’이 중요하다고 역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 점이 바로 그가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법가와 확연히 구별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군도」편에 나오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그 증거이다.
“난군(亂君)은 있어도 난국(亂國)은 따로 없다. 치인(治人)은 있어도 치법(治法)은 따로 없다. 법이란 다스림의 시작이요 군자란 법의 근원이다.”
순자는 바로 법치만으로는 결코 치국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통찰한 것이다. 이는 다스림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위정자이기 때문에 법치는 군자에 의해 운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주장은 공자의 군자정치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는 순자가 법가와 달리 군주의 인격이 법제 밖으로 노출되는 것을 적극 권장한 사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정론」편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군주는 인민들을 선도하는 자이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의표(儀表)이다. 선도가 없으면 인민은 호응할 수 없고 의표가 숨게 되면 아랫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는 법가가 군주는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과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 순자의 이런 주장은 ‘치법’보다 ‘치인’을 중시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법의 역할을 적극 수긍하면서도 법을 다루는 사람의 중요성을 역설한 데서 순자의 법치에 대한 기본입장이 선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순자의 예치사상은 근원적으로 그의 존군(尊君)사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순자는 군주를 예치의 모범인 동시에 치란(治亂)의 관건으로 보았다. 그의 존군사상은 그의 예치사상과 마찬가지로 현실주의의 바탕 위에 입론해 있는 것이다.
공자는 군주를 가볍게 보지도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보지도 않았다. 맹자는 백성을 높이고 군주를 낮췄다. 그러나 그의 ‘귀민경군(貴民輕君)’ 사상은 사실 당시의 세태에 비춰볼 때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순자는 존군의 필요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공자사상에 나타나는 존군의 이념을 공식적으로 이론화했다. 그의 존군사상은 군주가 ‘치란’의 유일한 관건이라는 그의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치사(致士)」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군주는 나라에서 높은 사람이고 부친은 가정에서 높은 사람이다. 높은 사람이 하나이면 다스려지고 둘이면 혼란해진다.”
이는 맹자가 군주를 가볍게 본 것과 대조적인 입장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군주가 지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만 존군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법가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순자는 법가와 마찬가지로 군주의 자리를 높이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숨은 재사를 적극 등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점이 법가의 ‘귀군(貴君)’ 사상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점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존군사상이 유가의 기본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순자의 존군사상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권력독점이 보편화된 전국시대 말기의 시대상황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순자는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가장 큰 이유를 상하분별이 어지러워진 데서 찾았다. 그는 이를 바로 세우는 책임이 바로 군주에게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부국」편에서 치란에 대한 군주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사람은 무리를 지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리 지어 살면서 분별이 없으면 싸울 수밖에 없다. 분별이 없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큰 해악이다.”
상하분별을 바로 하는 것이 치국의 요체라는 지적이다. 이는 곧 ‘예치’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치를 실현하는 최종책임은 군주가 질 수밖에 없는 까닭에 군주는 누구보다도 예치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는 공자가 군자정치를 내세우면서 수신제가를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순자가 ‘법치’를 적극 수용하고 ‘존군’을 강조한 점 등을 이유로 그를 법가의 원조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그가 주장한 예치사상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치 못한 소치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는 그가 존군의 필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주의 선정을 군도(君道)의 핵심으로 역설한 사실 등이 뒷받침한다. 순자는 군주는 지존의 위치에 있는 까닭에 인민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민생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정론」편에 나오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그 증거이다.
“위는 아래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위가 밝으면 아래는 자연히 다스려진다. 위가 성실하면 아래는 순박해지고 위가 공정하면 아래는 곧 바르게 된다.”
군주가 일을 처리할 때 공명정대하고 인민들의 모범이 되어야만 나라가 바르게 다스려질 수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 통치의 공명정대(公明正大)를 강조한 순자의 이런 주장은 군주의 비밀엄수(秘密嚴守)를 강조한 법가의 주장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순자의 예치사상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사상적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현실에 함몰되지 않았던 점에 그 특징이 있다.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려고 한 순자의 이런 태도는 공자의 기본자세와 닮은 것이었다. 이는 그의 군신(君臣) 및 군민(君民)에 대한 입장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군신에 관한 순자의 기본입장은 ‘예’에 입각한 군신간의 절도를 강조한데서 그 특징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왕제」편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무릇 양편이 모두 귀한 사람이면 서로 섬길 수 없고 양편이 모두 천하면 서로 부릴 수가 없다. 이는 하늘의 법칙이다.”
그는 군신관계를 상하분별을 가늠하고 ‘예’를 실현하는 기본 축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그가 「유표」편에서 ‘예는 군주가 뭇 신하들을 재기 위한 잣대이다’라고 단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를 통해서만 신하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그의 이런 주장은 공자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공자도 「논어」「팔일」편에서 ‘군주는 신하를 부릴 때 예로써 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순자는 「군도」편에서 바람직한 군신관계를 다음과 같이 비유한 바 있다.
“군주는 홀로 있어서는 안 되고 경상(卿相)이 보좌해야 한다. 그들은 군주의 기반이며 지팡이인 것이다.”
이는 바람직한 통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통치의 두 축인 군주와 신하 모두 자신의 위치와 직분에 따른 분업과 협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일을 간섭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일을 침해하는 것은 분업과 협업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그는 군주가 사사로이 일을 처리할 경우 적지 않은 폐해를 가져 올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군도」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그 증거이다.
“총명한 군주는 사사로이 금옥 같은 보물을 주기는 해도 사사로이 관직이나 일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사로이 하는 것이 누구에게도 불리하기 때문이다.”
순자의 존군사상이 법가의 그것과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군주가 권력을 사사로이 행사하면 암군과 간신이 나올 수밖에 없어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군주는 어디까지나 ‘예’를 체현한 군자여야만 한다고 역설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왕제」편에서 군주가 군자여야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천지는 생명의 시작이고 예의는 다스림의 시작이며 군자는 예의의 시작이다.”
공자가 강조한 군자정치의 군주가 ‘인’을 체현한 자이어야 하듯이 순자의 예치사상에 나타나는 군주 역시 예치를 구현한 자이어야만 한다. 그는 모든 신민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정하고 그것을 감독하는 것이 군주의 기본 역할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군신 상하간의 절도가 무너지면 예치국가의 실현은 불가능해진다. 예치를 총괄하여 감독할 사람은 궁극적으로 군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군주는 지존의 위치에서 권위를 갖지 않으면 이런 막중한 직무를 수행할 길이 없게 된다. 순자가 존군을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순자의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군신 상하간의 절도를 감독하기 위해 군주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법가가 말하는 ‘귀군’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순자가 존군을 주장한 것은 군주에게 예치의 실현을 감독하고 관리해야 하는 중요한 직무가 부여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순자가 말하는 군주는 비록 지존의 자리에 있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예치의 실현을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 그 자신이 영토와 민중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예치 실현의 수범이 되어야 하는 군주는 일종의 신민의 공복일 따름이다.
당연한 결과로 군주가 그 천직을 다할 수 없게 된다면 존군의 이념은 상실될 수밖에 없고 자칫 폐위도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순자가 직접적으로 폐군(廢君)을 거론한 적은 없다. 그러나 소위 위도(危道)와 망도(亡道)의 길을 걷는 군주의 교체를 수긍한 점에 비춰 그 또한 비록 맹자의 ‘폭군방벌론’ 차원은 아닐지라도 폐군의 가능성을 적극 용인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그는 「정론」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천하가 돌아오게 되면 왕자라 하고 천하가 버리면 망자라 한다. 그러므로 걸(桀)ㆍ주(紂)는 천하가 없었던 것이고 탕(湯)ㆍ무(武)는 군주를 죽인 것이 아니다.”
순자의 이런 언급은 맹자가 말한 소위 ‘일부가주론(一夫可誅論)’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맹자의 ‘일부가주론’은 폭군은 당연히 방벌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도출된 것으로 말 그대로 신하들의 적극적인 반기(叛起)를 종용하는 ‘가주론(可誅論)’이다. 이는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순자의 그것은 천하가 버렸기 때문에 누구의 힘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의 일종의 ‘가망론(可亡論)’인 것이다. 이는 혁명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변혁론(變革論)에 가깝다. 걸ㆍ주는 탕ㆍ무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망했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순자의 논리에 따르면 ‘망자(亡者)’는 ‘망도’로 줄달음친 ‘호리다사(好利多詐)’의 인물이기 때문에 스스로 망할 수밖에 없다. 순자가 탕ㆍ무와 걸ㆍ주를 언급한 것은 맹자의 ‘일부가주론’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맹자의 역성혁명론에서는 신하들이 군주가 폭군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주체가 되나 순자의 변혁론에서는 천하인이 판단의 주체가 된다. 그 요건이 훨씬 엄격한 것이다. 순자의 변혁론은 신하들의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봉쇄돼 있다는 점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 그가 요순의 ‘선양설(禪讓說)’을 부인하고 이른바 ‘승계설(承繼說)’을 주장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순자는 요와 순이 보위를 선양한 것이 아니라 순과 우가 각각 덕을 바탕으로 보위를 승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역대 중국정권에서 가장 이상적인 왕조교체의 방법으로 인식되어 온 선양설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선 것이나 다름없다. 순자는 「정론」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도덕이 완비되어 있고 지혜가 밝아 천하의 일을 처리하면 그것에 동조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어기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그런데 천하를 물려주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요순이 보위를 물려준 것은 선양이 아니라 물려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순자의 지적인 것이다. 그는 걸ㆍ주의 패망에 대해 ‘가망론’을 전개한 것과 동일한 논리 위에서 ‘승계설’을 전개한 것이다. ‘가망론’가 ‘승계설’은 순자가 군신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존군사상을 고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존군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민(爲民)’에 두고 있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대략」편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하늘이 인민을 낳은 것은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늘이 군주를 세운 것은 인민을 위한 것이다.”
이는 통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위민’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순자가 언급한 ‘법치’와 ‘존군’은 어디까지나 ‘예치’와 ‘위민’의 보조 개념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순자와 법가의 주장이 극명하게 갈리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순자의 ‘위민’사상은 맹자의 ‘귀민’사상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맹자는 군주와 인민의 순위가 차별적으로 확정된 ‘귀민경군’사상을 주장한데 반해 순자는 군민 간에 우선순위를 배제한 일종의 ‘중민존군(重民尊君)’사상을 주장한 셈이다. 순자는 인민을 위한다고 해서 결코 군주를 가볍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왕제」편에 나오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형은 형답고 동생은 동생다워야 한다.”
이는 「논어」「안연」편에서 나오는 ‘군군신신(君君臣臣)ㆍ부부자자(父父子子)’ 구절에 ‘형형제제(兄兄弟弟)’ 구절을 덧붙인 것에 해당한다. 순자가 말하는 ‘중민존군’ 사상은 바로 군신 및 부자, 형제가 각자의 입장에서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함으로써 그 타당성을 확보하는 소위 ‘분의론(分宜論)’에 그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순자의 이런 주장은 ‘존군’은 분명 ‘중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존군’이 이뤄지지 않으면 ‘중민’ 역시 불가능하다는 논리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군민 모두 역할상의 차이만 있을 뿐 예치국가의 동일한 성원이라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군민관계에 관한 순자의 시각은 공자의 ‘위민존군(爲民尊君)’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공자도 군민 모두 서로에 대해 도덕국가를 실현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소위 ‘군민일체(君民一體)’의 입장에 서 있다.
순자의 ‘중민존군’ 사상은 군주는 지존의 위치에 서 있기는 하되 반드시 인민을 위해 선정을 베풀어야 하고 인민도 상하의 절도를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중민존군’ 사상은 군주가 지존인 것은 사실이나 ‘중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지 않으면 신사국망(身死國亡)을 초래할 수밖에 없고, 신민 또한 상하의 절도를 무시하고 ‘경군(輕君)’을 일삼아 나라의 쇠망(衰亡)을 초래하면 유맹(流氓)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는 의미로 결론지을 수 있다. ‘중민존군’의 요체가 바로 ‘예치’에 있는 셈이다. 순자가 제창한 예치사상은 의치(義治)로 왜곡된 공자의 인치(仁治)사상을 원래의 의미로 복원시켰다는 점에서 그 사상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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